칼럼 [최호윤 칼럼] 사랑과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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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2-11-30 10:24 / 조회 3,052 / 댓글 0본문
사랑과 소통
아이들이 즐기는 공놀이는 서로 공을 주고받는 동작의 과정이다. 주고받음은 상대가 있음을 인정하고 같이 더불어 하는 공동체 활동이다.
세상은 목회자들의 세금에 관해 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지만, 던져진 질문에 대해 답변을 주고받지 않고 교회의 특수성만을 앞세운 방향으로만 화답하니 세상은 교회를 세상과는 무관한 조직으로 보며 비난한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목회활동으로 받는 소득을 ‘소득이 아니라 사례비, 생활비’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생활비는 교회의 규모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회자의 생활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어야 함에도 능력에 비례한 생활비로 비춰지는 현실 상황에서 사회는 이를 수긍하지 못한다.
‘목회자는 특수한 직분이다’라는 얘기에 대해서 종교적 배경이 없는 사회는 목회자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없으며, 특수한 직분의 역할에 대한 정서적 동의가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왜 목회자가 세금에 관해 차별적 혜택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오히려 사회는 ‘목회자만 세상에서 좋은 일 하는가? 선한 목적을 가진 비영리단체 활동가들도 좋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사업가 또는 직장인들도 좋은 일하는데’ 라고 반문한다. 희생이 선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들과 차별된 희생의 삶을 인정하지 않은 사회는 모든 국민이 부담하는 납세의무를 목회자만 부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공동체적 배신감을 가진다.
공놀이에서 주고받음의 규칙을 지키지 않음은 놀이에서 제외됨을 의미한다. 사회가 던진 의문에 대해 설명을 하고, 다시 사회가 가지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과정은 교회가 사회를 ‘이 땅에서 더불어 같이 가야 할 공동체’로 인정하는 과정이며,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과정이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던져진 질문에 반응하지 않으면 세상은 교회를 무시하고, 교회가 외치는 진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세금을 부담하는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로마서는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롬13:7)라고 명시하고 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권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선을 베푸시는 자이다. 진리를 거스르고 국민을 무시한 패역무도한 조직으로서의 국가가 아니라면 우리는 국가가 정한 세금과 관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둘째, 빌립보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오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2:5~8)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소통하시기 위해 종의 몸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시며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요구했다. 바울 이전에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너희가 이 땅을 하나님나라로 만들기 위해 사랑하고, 다가가고, 소통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 목회자의 세금 문제는 사회의 통합과 질서유지에 공헌하고 거두어진 세금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도록 하는, 기독교의 사랑을 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셋째, 성경말씀은 기차를 탈 때 차비를 내라고 직접적으로 명령하지는 않는다. 또한 차비를 내지 말라고도 명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차비를 낸다. 기차를 운행하기 위한 비용을 분담하고 차비를 내는 것이 서로간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세금도 같은 맥락이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국가라는 공동체의 운영비용을 분담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며, 또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국민들 간의 약속이고 규칙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비용집행을 효율적으로 하는 지 여부는 별개의 사안으로 그 또한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이지만, 세금은 공동체구성원으로서 부담하는 비용분담금 성격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목회자가 세금을 부담하지 않으려면 일반 국민들이 모두 수긍하는 선에서 소통되어야 한다.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외로운 길을 걷는 목회자들이 몇 푼 안 되는 세금을 절약하려는 의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더욱 교회의 언어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만의 소리가 아니라 사회가 인식할 수 있는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 사랑의 반대어는 미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교회가 사회와 소통하지 않는 것은 세상을 품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77948
아이들이 즐기는 공놀이는 서로 공을 주고받는 동작의 과정이다. 주고받음은 상대가 있음을 인정하고 같이 더불어 하는 공동체 활동이다.
세상은 목회자들의 세금에 관해 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지만, 던져진 질문에 대해 답변을 주고받지 않고 교회의 특수성만을 앞세운 방향으로만 화답하니 세상은 교회를 세상과는 무관한 조직으로 보며 비난한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목회활동으로 받는 소득을 ‘소득이 아니라 사례비, 생활비’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생활비는 교회의 규모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회자의 생활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어야 함에도 능력에 비례한 생활비로 비춰지는 현실 상황에서 사회는 이를 수긍하지 못한다.
‘목회자는 특수한 직분이다’라는 얘기에 대해서 종교적 배경이 없는 사회는 목회자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없으며, 특수한 직분의 역할에 대한 정서적 동의가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왜 목회자가 세금에 관해 차별적 혜택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오히려 사회는 ‘목회자만 세상에서 좋은 일 하는가? 선한 목적을 가진 비영리단체 활동가들도 좋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사업가 또는 직장인들도 좋은 일하는데’ 라고 반문한다. 희생이 선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들과 차별된 희생의 삶을 인정하지 않은 사회는 모든 국민이 부담하는 납세의무를 목회자만 부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공동체적 배신감을 가진다.
공놀이에서 주고받음의 규칙을 지키지 않음은 놀이에서 제외됨을 의미한다. 사회가 던진 의문에 대해 설명을 하고, 다시 사회가 가지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과정은 교회가 사회를 ‘이 땅에서 더불어 같이 가야 할 공동체’로 인정하는 과정이며,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과정이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던져진 질문에 반응하지 않으면 세상은 교회를 무시하고, 교회가 외치는 진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세금을 부담하는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로마서는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롬13:7)라고 명시하고 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권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선을 베푸시는 자이다. 진리를 거스르고 국민을 무시한 패역무도한 조직으로서의 국가가 아니라면 우리는 국가가 정한 세금과 관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둘째, 빌립보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오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2:5~8)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소통하시기 위해 종의 몸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시며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요구했다. 바울 이전에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너희가 이 땅을 하나님나라로 만들기 위해 사랑하고, 다가가고, 소통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 목회자의 세금 문제는 사회의 통합과 질서유지에 공헌하고 거두어진 세금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도록 하는, 기독교의 사랑을 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셋째, 성경말씀은 기차를 탈 때 차비를 내라고 직접적으로 명령하지는 않는다. 또한 차비를 내지 말라고도 명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차비를 낸다. 기차를 운행하기 위한 비용을 분담하고 차비를 내는 것이 서로간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세금도 같은 맥락이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국가라는 공동체의 운영비용을 분담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며, 또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국민들 간의 약속이고 규칙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비용집행을 효율적으로 하는 지 여부는 별개의 사안으로 그 또한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이지만, 세금은 공동체구성원으로서 부담하는 비용분담금 성격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목회자가 세금을 부담하지 않으려면 일반 국민들이 모두 수긍하는 선에서 소통되어야 한다.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외로운 길을 걷는 목회자들이 몇 푼 안 되는 세금을 절약하려는 의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더욱 교회의 언어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만의 소리가 아니라 사회가 인식할 수 있는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 사랑의 반대어는 미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교회가 사회와 소통하지 않는 것은 세상을 품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77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