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광은 칼럼] 뜨거운, 너무나도 뜨거운 성공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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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2-09-03 10:46 / 조회 3,446 / 댓글 0본문
뜨거운, 너무나도 뜨거운 성공욕
메가처치의 내장 들여다보기(3)
이제 메가처치 현상을 추동하는 추진력 중에서 누구나 잘 알고 있고 있으며 가장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즉 세속적 성공 욕망에 대해서 살펴보자. 왜 교회 성장을 원하는가? 성공을 위해서다. 적지 않은 목회자, 혹은 평신도들은 교회 성장을 마치 사업의 성공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게를 차렸으면 손님이 많이 몰려야 하듯이 교회를 개척했으면 고객들이 차고 넘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게 주인이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기를 원하듯 교회는 성장하기 원한다.
사실 목회에서 성공을 거두고 싶어 하는 목회자의 야망과 포부, 그리고 자기네 교회가 굴지의 메가처치 반열에 오르기를 바라는 장로들과 집사 및 평신도들의 욕망은 너무도 공공연하다. 이러한 음흉하고 역겨운 욕망은 오늘날 교회가 세워지는 거의 모든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목회 성공을 거두고자 목숨을 건 성장 경쟁에 뛰어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투쟁의 결과로 수많은 메가처치들이 생겨나고 있다. 대부분의 비판가들은 종교 비즈니스의 성공을 추구하는 목회자와 교회를 세속적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사업으로 변질된 교회 사역
교회 성장과 성공을 동일시하게 된 데는 교회성장학이 성공학으로 변질된 게 한몫을 차지한다. 도날드 맥가브란이 교회성장학을 제안했을 때, 그것은 일종의 선교 전략이었다. 그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교회와 신자가 교회 성장에 주된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교회 성장은 세계 복음화에 가장 효과적인 전략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교회성장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개교회의 성장 전략으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아예 개교회와 목회자 개인의 성공학으로 바뀌고 말았다.
교회성장학을 성공학, 내지는 성공의 기술로 바꾼 대표적인 인물은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다. 그는 잘 알려져 있듯이 캘리포니아의 가든 글로브(Garden Grove)에 '수정교회(Crystal Church)'라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당을 세운 장본인이다. 철과 유리로 지어진 투명한 그의 교회당은 1851년 런던 하이드파크에 세워졌던 수정궁(Crystal Palace)을 연상케 한다. 영국의 수정궁이 그랬듯이 수정교회도 기적적인 성공과 부와 능력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처음 가든 글로브교회를 개척했을 때 드라이브인 교회(drive-in church)라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창안했다. 유난히 사업 수완에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오늘날까지 성공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거리낌 없이 사용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최근 수정교회가 부도가 나기 전까지 20세기에서 가장 성공한 목사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성공의 배경에는 그의 독특한 교회성장학이 자리 잡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로버트 슐러표 교회성장학은 사실 성공학이자, 성공의 기술이다. 그의 교회성장학을 살펴보면 그는 너무도 뻔뻔하고 노골적으로 교회 성장을 목회 성공과 동일시한다. 그는 아예 목회를 "상품을 가져다가 고객에게 봉사하는" 사업이라고 대놓고 말을 한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란 일종의 상품을 판매하는 일이다. 그래서 교단은 도매점이고, 지역 교회는 소매점이다(1988: 299).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그는 자신의 교회성장학 서적에서 성공을 위한 다양한 지침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성공의 7가지 원리를 자신 있게 소개하는데 그가 소개하는 (교회)사업 성공의 7가지 원리는 접근성, 주차장 확보, 다양한 상품 확보, 서비스, 시각적 어필, 긍정적 사고, 그리고 원활한 현금 유통 등이다(299-14). 이 원리들만 보고 누가 이것들을 복음 증거의 원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계속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11가지 원리를 소개하고(315-28), 또 아이디어를 성공적으로 전하는 법에 대해서(329-47)와 확실한 성공에 대한 세 가지 열쇠(381-406) 등을 가르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목회를 사업이라고 보는 것을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의 지나치게 노골적인 표현에 당황하거나 분노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반응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이런 식이다. 'Why not?(왜 안 되지?)' 그는 자신이 제시하는 7가지 원리를 충실히 따른다면 교회 성장은 분명 이루어진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실제로 그가 제시한 원리는 현실적이며, 효과적이다. 그것은 분명 현실 속에서 잘 작동한다! 어찌 보면 로버트 슐러는 이미 목회 현장에서 작동하고 있는 원리를 언어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현실 속에서 교회 성장은 성공적인 종교 비즈니스와 구분되지 않는다. 비즈니스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데 대체 그 원리를 활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생각해 보라. 교회 성장을 위해서 교회당을 건축하지 않을 수 없고, 그에 걸맞은 주차장을 확보하지 않을 수 없고, 또 필요하다면 은행에서 융자를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들은 정확히 사업가가 사업의 확장을 위해서 꾀하는 행동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콘텐츠가 복음이라는 것만 빼고 말이다. 메가처치가 되면 될수록 로버트 슐러의 낯 뜨거운 교회성장학은 더욱 잘 적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건강한 메가처치나 건강하지 않은 메가처치에 별 차이가 없다.
건강한 메가처치, 안 건강한 메가처치?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이러한 음흉하고 역겨운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교회 성장을 순수한 복음주의적 열정으로 일구어진 교회 성장과 구분하려 한다. 필자는 이러한 식의 구분을 반대한다. 필자가 누차 반복해서 강조하는 바이지만 음흉하고 역겨운 성공 욕망을 영혼 구원에만 매진한다는 복음주의자들의 열정과 구분하려는 태도는 메가처치 현상을 제대로 통찰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식의 이분법은 메가처치 현상 합리화의 장치로 기능할 뿐이다.
사람들은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가 문제지 건강한 메가처치는 문제가 아니다"는 말을 되풀이하지만, 사실 이 둘은 구분되지 않는다. 도대체 건강한 메가처치와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을 누가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누군가가 메가처치들을 건강한 메가처치와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로 분류했다고 해 보자. 건강하지 못한 교회라고 분류된 교회가 이를 수긍하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결국, 기준도 없고 구분도 못 한다. 따라서 건강한 메가처치와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란 무의미한 구분일 뿐이다.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무엇이 건강 상태고 무엇이 병든 상태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메가처치 현상에 대한 진단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진단이 불가능하면 자연히 치료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건강한 메가처치와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말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꾸만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메가처치 현상 자체를 비판하지 않으려는 속셈이다. 문제의 원인을 메가처치 현상 자체가 아니라 (특정할 수도 없는) 일부 목회자나 일부 교회로 돌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메가처치 현상에 대한 합리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변명과 합리화는 수많은 소위 복음주의자들의 의식 속에 너무도 강력하게 뿌리박혀 있어서 지금 상황을 객관적으로 통찰하는 것을 도무지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메가처치는 그저 메가처치일 뿐 건강한 메가처치와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현상적으로 이 둘 사이의 차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상대적으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좀 더 건강해 보이는 메가처치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건강한 메가처치와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무처럼 보이지만 더듬어 들어가 보면 땅속에서는 이 둘의 뿌리가 완전히 서로 얽혀 있다. 하여 둘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나누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그 둘을 나누려는 시도는 마치 손바닥과 손등을 나누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시도다.
교파 교회의 탄생
그렇다면 어째서 이 둘이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되게 된 것일까? 그것은 교회가 시장상황(market situation)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시장상황은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L. Berger)의 세속화 이론 중 핵심적 개념인데 이에 대해서는 차차 다루도록 하겠다).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점차 시장의 논리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시장의 논리에 굴복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는 교회 분열이다. 교회가 분열되어 다양한 교단이 생기자 교인들은 여러 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교단 선택이 소비자의 구매 행위와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교회를 시장의 논리에 점령당하게 만들었다.
현대의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장이다. 특히 교회의 시장화 과정을 살펴볼 때 주목해야 할 곳은 바로 18세기 이후의 미국 교회다.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와 로저 핑크(Roger Finke)는 미국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의 시장적 특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역사 속에서 자유로이 교단을 선택하고, 고객 유치를 위한 교단 간 경쟁을 벌이고, 그 경쟁을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시장의 특성이다(2009: 30).
우리는 지금 교회사 중 18세기 미국에 나타난 대단히 특이한 현상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바로 교파 교회(denominational church)라는 현상이다. 교파교회는 미국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종종 불신자들은 전도하는 기독교인을 향해서 "기독교는 왜 그렇게 교단이 많습니까?"라고 묻곤 하는데, 이 질문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별로 많지 없다. 하지만 교파 교회 현상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베드로나 바울이 이런 상황을 보았다면 분명 까무러치고 말 것이다. 교파 교회는 초대교회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적어도 18세기 미국 교회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현상이기도 하다.
교파 교회란 무엇인가?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공회, 가톨릭 같은 여러 종단과 교단이 한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교파주의 때문에 교단은 서로 자신만의 교리와 설교, 프로그램으로 교인을 유치하려고 경쟁하게 된다. 이러한 교파 교회 현상은 2000년 기독교 역사 중 18세기 미국에서 최초로 출현한 그야말로 기현상이다. 이러한 대단히 기묘한 구조인 소위 교파라는 조직은 대릴 구더의 말대로 정확히 미국 기업의 모델을 따라 확장되고 재구성되어 왔다(2005: 31).
초기 미국 교회를 살펴보면 초기 미국의 중심지였던 뉴잉글랜드는 회중교회가 대부분 장악했다. 그 주변으로는 장로교, 성공회, 침례교, 퀘이커교 등이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었다(2009: 56-63). 초기 미국 교회사에서 중요한 것은 미국이 역사상 거의 최초로 국가와 교회가 분리된 것이다. 1791년에 발효된 미국의 수정헌법 제 1조는 "의회는 종교의 설립에 관여하거나 그것의 자유로운 실행을 금지하는 어떠한 법도 만들 수 없다"고 되어 있다(Noll, 2005: 188). 그리고 이것은 미국에서 모든 교파가 동등하게 인정받고, 공정하게 복음 전도를 위해 경쟁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교파도 경쟁력 있어야 살아남는다
본격적인 경쟁은 1차 대각성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대각성 운동과 더불어 요한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의 감리교,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 순회 설교자들이 활약을 벌인 침례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776년의 시장 점유율을 살펴보면 회중교회 20.4%, 장로교 19%로 1, 2위를 달리던 두 교단이 1850년이 되면 각각 4.0%, 11.6%로 추락한다. 성공회도 큰 낭패를 본 교단인데 15.7%에서 3.5%로 추락했다. 반면 감리교는 2.5%에서 무려 34.2%로 증가하며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꿰찬다. 침례교도 16.9%에서 20.5%로 크게 성장한다(2005: 198).
감리교와 침례교의 성장은 무엇 때문인가? 감리교와 침례교 복음 전도자들이 회중교회나 장로교의 목회자들보다 훨씬 더 열정적이고, 복음적이고, 순수해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소외 캠프 집회와 순회 설교 같은 획기적이고, 효과적이며, 공격적인 복음 전도 방식의 도입 여부가 성패를 가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감리교와 침례교는 이 두 가지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데 반해 다른 교단은 이를 도입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것이다(2009).
미국이라는 신생 국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의 방식에 적응해야 했다. 하지만 회중교회나 장로교, 성공회는 경쟁 체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뉴잉글랜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회중교회는 안정적인 교구제에 안주하려고 했는데, 이는 자유 경쟁이 허용된 미국이라는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태도였다. 반면에 감리교와 침례교 복음 전도자들은 통상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로 인식되었는데, 그들은 교구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복음 전도가 필요한 지역이면 아무리 오지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갔고, 타 교단의 교구에도 기꺼이 들어갔다(2009).
특히 서부 개척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실상 공터나 다름없었던 서부에는 뉴잉글랜드 같은 지역에 아직까지 남아 있던 교구제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깃발 꼽는 자가 임자였다. 이러한 서부에서 사실상 완벽한 형태의 경쟁이 가능한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황무한 서부 지역으로 복음을 들고 들어갈 수 있는 교단은 감리교와 침례교,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같은 공격적 복음주의자들뿐이었다. 이들은 열정적인 부흥 집회, 캠프 집회, 순회 전도 등 공격적 전도를 통해서 서부 지역을 선점할 수 있었다(1991).
하지만 점차 시장의 판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를 살펴보면 감리교가 급속하게 추락하는 것을 보게 된다. 1850년의 감리교는 인구 1000명당 117명으로 미국 종교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렸다. 하지만 1926년이 되자 101명까지 내려온다. 반면에 침례교는 1850년에 1000명당 70명이던 것이 1926년이 되면 106명이 되어 감리교를 추월한다(2009: 236).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감리교가 경쟁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감리교 순회 설교자들이 말에서 내려오고 신속하게 제도화의 길을 걸으면서 감리교의 경쟁력이 급속하게 사라져갔다. 하지만 침례교는 특별히 남침례교는 감리교와는 달리 제도화의 길을 피하고 초기의 열정을 지속적으로 이어감으로써 경쟁력 제고에 성공한다(2009: 275-80).
한편, 감리교회가 성장의 동력을 상실함으로 시장에 공백이 발생하자 그 틈을 성결교회, 나사렛교회, 오순절운동 등이 뚫고 들어온다. 이들은 감리교회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새로운 경쟁력으로 무장하고 감리교가 쇠약해진 틈새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2009). 그리고 그들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 성장한 또 다른 부류의 교회는 흑인 교회와 이민자 교회인데 이는 흑인과 이민자의 유입을 통해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면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편, 19세기에 가장 약진한 교회 중 하나는 가톨릭교회다.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에 의해서 세워졌기에 가톨릭교회는 상대적으로 미국에서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 특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정신을 강력하게 발전시키고 있는 미국인들의 정서에 가톨릭교회의 교황주의는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미국의 가톨릭교회는 흥미롭게도 복음주의자들의 전도 방법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경쟁력 제고에 힘을 쓴다.
미국 가톨릭교회는 우선 복음주의자들의 부흥 운동을 수용해서 가톨릭식 부흥 운동을 만들어 낸다. 가톨릭 부흥 운동가들은 신자들의 영을 살리고 영혼 구원에 매진한다. 영구차와 관을 앞에 세워두고 회중들에게 죽음과 지옥을 설교하여 눈물로 회개하게 만들었다. 또 순회 설교도 도입했다. 예수회 소속 프란시스 베닝거(Francis Weninger)와 같은 순회 설교가는 800회 이상의 전도 집회에 설교하기 위해서 20만 마일 이상을 여행했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감리교나 침례교처럼 서부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뛰어든다. 수녀들의 헌신, 순교자들의 열정, 이민자들에 대한 공격적 전도 등은 가톨릭교회를 19세기에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로 만들었다. 그 덕에 가톨릭교회는 1850년 종교 시장 점유율이 14%이던 것이 1926년에 28%까지 성장했다(2009: 181-233).
교단 경쟁에서 교회 경쟁으로
이러한 교단 간 성장 경쟁이 20세기에 들어서면 점차 개교회들 간의 성장 경쟁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20세기 중반 이후 출현한 개교회주의(church individualism) 때문이다. 개교회주의는 교파주의(denominationalism)가 점차 쇠락하면서 개교회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생겨난 현상이다. 개교회주의란 개교회가 기존의 교단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와 함께 교회는 점차 토마스 홉즈가 말했던 '만인이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완전한 무정부적 시장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완전 경쟁 상황에서 교회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성장을,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성공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메가처치 현상은 탈교파주의, 다른 말로 개교회주의의 산물이다.(Williams, 2010)
이상의 역사를 통해 간단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시장 점유율의 확대와 교단의 경쟁력은 정비례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교단의 경쟁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격적인 복음 전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차 대각성 운동 이후 성장하는 거의 모든 교단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공격적 복음 전도를 도외시했던 교단은 몰락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교단은 한결같이 성장했다. 심지어 가톨릭교회조차 복음주의적 전략을 취함으로 시장 점유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여 시장 상황은 흥미롭게도 모든 교단의, 심지어 모든 종교의 복음주의화를 초래했다.
여기서 우리는 메가처치 현상을 추동하는 성공을 향한 열망이 무척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성공을 향한 열망은 로버트 슐러같은 단순히 세속적인 목회자들이 품고 있는 음흉하고 더러운 야망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미국 교회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지난 250년 동안 교회는 점차 성장하지 않으면 쇠퇴한다는 시장의 논리를 학습하게 되었고, 이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부득불 교회는 성공에 대한 감수성을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즉 18세기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와 장로교의 몰락, 19세기 감리교의 몰락은 교회로 하여금 부단히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했다. 반대로 18세기 감리교와 침례교의 성공, 19세기 침례교의 승리와 가톨릭교회의 약진, 성결교와 나사렛교, 오순절 운동의 틈새시장 공략 등은 교회가 경쟁력 제고에 성공한 교회가 시장 점유에 있어서 성공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교회는 점차 살벌한 성장 경쟁의 장이 되었고, 나아가 생존 경쟁의 정글이 되어 갔다. 이러한 교단 간 각축장에서, 더 나아가 개교회들 간의 전쟁터에서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장의 논리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보이지 않는 손'을 하나님의 섭리의 손이라고 보았던 아담 스미스처럼 말이다.
이러한 시장 상황 속에서 교회는 점차 교회 성장과 시장 점유율의 확대를 혼돈하게 되고, 복음 전도와 종교 사업의 성공을 혼돈하게 된 것이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생겨난 사생아 중 한 명일 뿐이다. 바로 이 같은 이유로 필자는 세속적 성공주의자와 순진한 복음주의자의 구분을 거부하며, 건강한 메가처치와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의 이분법을 반대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모두 사업 성공을 향해 줄달음질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성공을 추구하는 교회와 복음 전도니 영혼 구령이니 하는 명분으로 성공 욕망을 은폐하여 암묵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즉 시장 상황 속에 처해 성장을 강요당하는 딱한 교회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나 명분이 어찌 되었든 모두가 성공을 추구하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성공의 추구가 현대의 메가처치 현상을 강력하게 추동하고 있는 견인력이다.
참고 목록
Chadwik, William. (2002). <양도둑질>. 전의우 역. 서울: 규장.
Guder, Darrell. (2005).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대한 신선한 통찰>. 조범연 역. 서울: 미션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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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ll, Mark. (2005). <미국 캐나다 기독교역사>. 최재건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Schuller, Robert. (1988). <성공적인 교회성장>. 권명달 역. 서울: 보이스.
Stark, Rodney & Finke, Roger. (2009) <미국 종교 시장에서의 승자와 패자>. 김태식 역. 서울: 요단.
Williams, Jeseph. (2010). The New Ecclesiology and the Post-Modern Age. Review and Expositor 107. 33-40.
신광은 / 대전 열음터교회 담임목사·<메가처치 논박>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