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광은 칼럼] 멈출 수 없는 자전거, 메가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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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2-09-25 15:26 / 조회 3,087 / 댓글 0본문
멈출 수 없는 자전거, 메가처치
메가처치의 내장 들여다보기 (4)
메가처치 현상을 이끌어 가고 있는 강력한 추진력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군중 심리적 요인이다. 메가처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한다면 그건 숫자가 큰 교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이 한 장소에 모였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심리적 특성이 있는데 이것은 구스타프 르봉(Gustave Le Bon) 이후 적지 않은 심리학자들이 주목했던 군중심리다.
군중심리의 전제는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것이다. 즉 군중은 그곳에 모인 개인들의 총합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메가처치에 적용해 보면 메가처치는 신자들의 모임 플러스알파(+α)인 교회다.
메가처치 = (2000명 이상의) 신자들의 모임 + α
여기서 플러스알파는 뭔가? 그것은 거대한 숫자가 한 장소에 모여 군중을 이룰 때, 그 군중 자체가 일으키는 심리적인, 혹은 사회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개신교 교회론에서 이러한 효과는 자주 간과된다. 전통적인 개신교 교회론은 교회를 각자 개인의 신앙을 소유한 개인들의 집단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교회론에서는 모임의 숫자에 대한 아무런 고려가 없다. 기본적으로 개신교 교회론에서 교회의 크기는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교인 숫자는 두세 사람이어도 상관없고, 수십만 명 이상이어도 상관없다. 숫자는 교회(신자의 모임)의 본질과 아무런 필연적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현대의 심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 모임이 되었든 임계점을 넘어 버린 거대한 군중은 그곳에 모인 개인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의 고유한 특질을 갖는다고 본다. 예컨대, 르봉은 말하기를 "군중을 형성하는 개인이 누구이건 이들의 생활양식, 직업, 성격, 교양이 비슷하건 비슷하지 않건, 그들이 군중으로 화(化)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일종의 집단 심리를 갖게 하며 여기에서 사람들은 평상시의 개인이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하게 된다(1990: 28)."
이러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모임의 숫자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숫자가 어느 수준을 넘어 버릴 때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그리고 쉽게 통제할 없는 군중 고유의 특질이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메가처치에 대해서 살필 때 고려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메가처치는 하나의 군중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군중으로서의 메가처치는 다른 종류의 군중과 마찬가지로 군중심리라는 심리적 특질을 갖는다.
그러한 심리적 특질 중 하나는 바로 기묘한 들뜬 기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메가처치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메가처치 예배는 마치 무슨 축제나 놀이공원 같은 뭔가 모를 고양된 흥분 상태가 그곳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차분하고 안정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들떠 있고, 고양되고,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업(up)되는 그런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교회다.
이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가 있다. 최근 워싱턴 주립대학교 연구팀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메가처치의 예배는 "초월 감각을 촉발시켜 뇌 속의 화학 성분을 바꾸어 줌으로써 마치 마약을 흡입했을 때처럼 '고조'(high) 상태를 지탱시켜 같은 교회로 되돌아오게 만든다"고 했다(<크리스천투데이>). 그리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교회 지도자들이나 예배 기획자들은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러한 효과를 증대하기 위해서 예배를 설계하게 된다. 그러는 중에 교인들은 메가처치의 분위기에 서서히 중독되게 된다.
"메가처치들은 대규모 회중 전체의 고조 상태의 조성을 위해 첨단 테크놀로지와 호소력 있는 진행 등의 방식을 활용한다고 코코런은 주장한다. 대형 화면에 비치는 현대적 음악, 미소, 춤, 노래와 환호, 강력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설교 등이 청중에게 이런 경지의 정서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대형 교회의 설교가들은 청중을 접근이 쉽고 정보적이고 감정적인 설교로 끌어들이는 '에너지 스타'역을 한다(<크리스천투데이>)."
메가처치의 이러한 들뜬 상태는 분명 대단히 독특하고 새로운 것이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메가처치의 이런 분위기를 우리의 향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옛날 시골 교회의 분위기와 한번 비교해 보자. 동네 어귀에 높은 종탑을 세우고 자리하던 시골 교회에서는 1년에 한두 번 하던 심령부흥회 때가 아니면 도무지 이러한 종류의 들뜬 상태를 경험할 수 없었다. 교회의 분위기는 늘 차분한 바닥 상태였다. 그리고 교인들은 이것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시골 교회라도 교회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주일학교 학생들에게는 신나는 공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 곳으로 기억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성탄절에 맛있는 간식을 기대하던 주일학교 학생들의 들뜬 기대감과 메가처치 예배당 전체를 꽉 채운 압도하는 흥분감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메가처치는 이런 들뜬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메가처치는 군중이고, 군중인 이상 군중심리를 가지며 그것에 휘둘린다. 군중심리를 형성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숫자다. 르봉은 군중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군중 속에 함몰 될 때 이 군중에게서 나타나는 첫 번째 특징을 "군중을 형성하는 개인은 오직 수적인 요인만을 생각한 나머지 수적인 힘을 느끼게 되고 혼자 있을 때는 억제했던 본능을 마구 발산한다"고 설명했다. 즉 사람들은 군중 속에서 숫자라는 강력한 힘을 발견하고 그 힘에 순식간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1990: 32).
그러니까 메가처치를 들뜬 상태로 만드는 이유는 바로 숫자인 셈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상태, 그 자체가 바로 그런 들뜬 상태를 창조하는 근본 원인이다. 월드컵 경기장에 모인 관중들은 자신들을 그토록 열광적이 되게 만드는 원인이 축구 경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실은 그곳에 그렇게 많은 숫자가 모여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들을 열광적이 되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자주 간과한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세기의 대결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관중이 기껏 여남은 명 정도 모여 있다면 그들은 결코 흥분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원리가 메가처치에도 적용된다. 왜 메가처치가 들뜬 상태일 수 있는가? 그건 간단하다. 많은 수가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메가처치 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씀이 좋다거나, 복음이 선포된다거나, 시스템이 좋다거나, 영혼 구원에 열심히 있다거나,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신다거나, 혹은 다른 이유를 갖다 대면서 그것 때문에 메가처치에서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단 그들을 그곳에 모이게 되면, 그들에게 가장 큰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이루고 있는 숫자다.
이 점에 대해서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설교를 하는 장소에 있게 되었다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설교라는 확신을 그가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누군가가 나서서 그에게 만족을 준 것은 설교 자체보다는 그곳에 참석한 청중의 숫자였다는 이론을 편다면 그는 놀라거나 아니면 아마도 화를 내었을 것이다(1982: 17)."
혹자는 메가처치가 그러한 들뜬 분위기를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문제 될 것이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사실 모든 공간과 장소는 각자 고유의 인상과 느낌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인상과 느낌, 분위기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모임의 성격, 내용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로마 시대의 카타콤과 가정 교회, 초기 기독교 예배당으로 차용되었던 바실리카, 무수히 많은 뾰족한 첨탑이 하늘까지 찌를 것 같은 중세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비롯한 동유럽의 그리스 정교회당, 혹은 러시아 정교회당 등은 각각의 고유의 분위기를 갖는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메가처치도 고유의 분위기를 갖는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간, 장소, 혹은 모임이 형성하는 분위기는 단순히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간과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한 느낌, 혹은 감정으로 치부될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월터 윙크(Walter Wink)는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다. "우리의 세계관은 극히 개인주의적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집단의 사람들을 그 자체의 유기적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저 개인들의 집합이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교회는 단순히 개인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유기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자체의 역사와 특성, 그리고 부르심을 가진 하나의 온전한 형태나 전체"다. (2005: 179-89)
따라서 교회를 바라볼 때 단순히 담임목사가 누구고, 그의 목회 철학이나 설교가 어떤지, 그리고 제자 양육 프로그램이나 경배와 찬양 스타일은 어떤지만 볼 것이 아니다. 그와 함께 건물과 장소, 인테리어, 사람의 수, 그들의 인종이나 계급, 권력 구조, 갈등 해결 방식 등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 (2005: 179-89) 그 모든 것들에 의해 창조되는 그 교회의 분위기는 바로 그 교회의 정신(spirit)의 반영이자, 영성(spirituality)의 투영이다.
이런 점에서 메가처치가 만들어 내는 독특한 분위기는 단순한 느낌이나 기분이 아니라 메가처치의 영적 실체와 분리될 수 없다. 특히 메가처치가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거대한 숫자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구자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월터 윙크식으로 말하자면 교회의 숫자는 그 교회의 영적 상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때문에 메가처치의 영성은 무엇보다도 숫자가 만들어 내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메가처치의 들뜬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자 하는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메가처치는 들뜬 상태를 지속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다. 하여 메가처치 담임목사나 사역자들은 그러한 들뜬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압박감에 늘 시달린다. 그것은 마치 저글링과 같다.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핀을 다시 공중으로 띄워 주고,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핀을 띄워 주어야만 하는 저글링 말이다. 앞의 <크리스천투데이> 기사를 한 번 더 인용해 본다.
"(메가처치의)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다음번의 히트를 위해 그때까지 기다리지는 못할 마약 같은 무엇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고조 상태를 다음 차례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거죠."
이러한 이유로 메가처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교회다. 메가처치는 마치 자전거처럼 멈출 수 없다. 움직여야 한다. 앞으로, 또 앞으로… 달리는 자전거처럼 멈추면 쓰러지는 것이 메가처치다. 메가처치는 계속 앞으로 움직이도록 닦달하는 교회다. 메가처치는 닦달당하는 교회, 곧 driven되는 교회다.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이 교회를 "목적이 이끄는 교회(purpose-driven church)"라고 표현했을 때 그는 이러한 추동력에 끌려가고 있는 메가처치를 정확히 잘 표현했다. 메가처치는 가만히 있는 교회가 아니다. 전진하는 교회다. 아니 전진해야만 하는 교회다. 하여 우리는 릭 워렌의 수사를 다양하게 응용해 볼 수 있다. 메가처치는 목적이 이끄는(purpose-driven) 교회임과 동시에 목표가 이끄는(goal-driven) 교회요, 성장이 이끄는(growth-driven) 교회요, 성공이 이끄는(success-driven) 교회며, 감정의 고조가 이끄는(pitch-driven) 교회다.
목적이 되었든, 목표가 되었든, 성장이나 성공이 되었든, 감정적 고양 상태의 유지가 되었든 간에 어쨌거나 메가처치는 그 뭔가에 의해서 질질 끌려가는(driven) 교회다. 교인이나 혹은 담임목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교회를 말아먹지 않으려면 담임목사나 사역자들은 그러한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하여 메가처치는 담임목사를 비롯해서 예배 스태프, 부교역자들, 평신도 지도자들, 그리고 온 교인들이 늘 어디론가 끌려 다니게 되는 정말로 피곤한 교회다.
우리는 여기서 메가처치가 성장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메가처치는 (그것이 옳든 그르든)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니, 지상 명령의 완수니,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전파 같은 신학적 당위 때문에 성장을 외친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들 외에도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에 성장을 강조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체의 존속을 위해서다. 메가처치는 존속하기 위해서 성장을 추구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로버트 슐러 목사의 교회성장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로버트 슐러는 교회가 이미 충분히 커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아무렇게나 숫자를 정해서 그것이 교회의 이상적인 크기로 생각하는 것은 중국의 전족(纏足)과 같다고 말한다. 커가는 아이의 발을 더 이상 크지 못하게 묶어 버리는 잔인한 중국의 풍속처럼 교회의 적당한 크기를 가정하는 것 역시 성장하는 교회에 일부러 속박을 가하는 어리석고 잔인한 짓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강조한다. "교회가 성장을 멈출 때 그것은 죽기 시작할 것입니다(1988: 201-2)."
그는 자주 "교회는 성장하든지 아니면 소멸하든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장하지 않으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슐러에게 있어서 성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1988: 198) 그리고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메가처치는 수시로 그러한 양자택일 앞에 서게 된다. 그러니까 슐러는 성장할 것이냐, 소멸할 것이냐를 양자택일해야 하는 메가처치의 곤경을 잘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메가처치가 소멸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성장하기로 결정한다는 뜻이다. 또 만일 성장하기로 결정한다면 교회는 정장의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위해 전심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만일 교회가 계속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교회는 계속해서 목표치를 상향 조정하며 교인들을 독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만일 교회가 100명을 목표로 전도해서 성장했다면, 곧바로 목표를 300명으로 수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목표가 달성되면 다시 500명으로, 1000명으로, 1만 명으로 목표를 수정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계속 목표를 수정해서 교인들 앞에 제시해야만 그 목표를 향해 교인들을 동력화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슐러의 교회성장학의 요지다.
하기는 그렇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아무런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는 메가처치를 말이다. 교인들이 헌신해야 할 뭔가가 없는 메가처치, 자신의 시간과 돈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대의(大義)가 없는 메가처치, 모든 교인에게 뚜렷하고 분명한 목표점이나 방향성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메가처치… 이런 메가처치가 탄력을 받을 수 있겠는가? 아니 과연 존속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로버트 슐러는 성장의 목표가 없는 메가처치는 붕괴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슐러의 교회성장학은 군중심리학의 통찰과 일치한다. 카네티는 군중심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성장의 충동이라고 했다. "군중은 일단 존재하게 되면 즉시 더 많은 숫자의 인간들에 의해 채워지기를 바란다. 즉 증대의 충동은 군중의 제일의 특성이자 최대의 특성이다(1982: 11)." 여기서 우리는 메가처치의 무한한 확장욕을 바라보는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을 가지게 된다. 메가처치의 무한한 성장 욕망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거대한 숫자로 모인 군중들의 심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메가처치 현상을 목사 개인의 불온한 세속적 야망과 성공욕에만 국한시켜서 비판해 왔던가. 하지만 메가처치의 성장 욕망의 훨씬 더 중요한 근원은 메가처치 교인들, 곧 그들이 군중을 이루고 모여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군중은 속성상 성장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성장을 멈추면 군중은 와해된다. "증대를 중지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의 붕괴가 시작된다(1982: 11)." 언제까지 성장하고 싶어 하는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포획할 때까지다. "세계 종교가 노리고 있는 것은, 처음에는 손을 뻗쳐서 획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이든 간에 손을 내밀어 포섭하는 데에 있다. 세계 종교가 우선 머리에 그리는 군중이란 보편적인 것이다. 온갖 개인의 영혼이 모두 세계 종교의 대상이 되며 모든 영혼은 세계 종교가 소유하는 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1982: 22)."
메가처치 현상은 바로 이러한 군중심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메가처치는 주변의 모든 포섭 가능한 사람들을 자기 구성원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과 국가, 나아가 전 세계 모든 외부인들을 몽땅 다 포섭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군중의 제국주의적 탐욕은 가장 근본적인 군중심리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러한 군중심리가 메가처치 현상을 추동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힘이다.
참고목록
Canetti, Elias. (1982). <군중과 권력>. 반성완 역. 서울: 한길사.
Le Bon, Gustave. (1990). <군중심리>. 전남석 역. 서울: 동국.
Schuller, Robert. (1988). <성공적인 교회성장>. 권명달 역. 서울: 보이스사.
Wink, Walter. (2005).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 박만 역. 고양: 한국기독교연구소.
"대형 교회 예배는 마치 마약처럼 기분'UP'" <크리스천투데이>. (2012. 8. 29.)
http://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20442§ion=section4§ion2
신광은 / 대전 열음터교회 담임목사·<메가처치 논박> 저자
메가처치의 내장 들여다보기 (4)
메가처치 현상을 이끌어 가고 있는 강력한 추진력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군중 심리적 요인이다. 메가처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한다면 그건 숫자가 큰 교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이 한 장소에 모였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심리적 특성이 있는데 이것은 구스타프 르봉(Gustave Le Bon) 이후 적지 않은 심리학자들이 주목했던 군중심리다.
군중심리의 전제는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것이다. 즉 군중은 그곳에 모인 개인들의 총합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메가처치에 적용해 보면 메가처치는 신자들의 모임 플러스알파(+α)인 교회다.
메가처치 = (2000명 이상의) 신자들의 모임 + α
여기서 플러스알파는 뭔가? 그것은 거대한 숫자가 한 장소에 모여 군중을 이룰 때, 그 군중 자체가 일으키는 심리적인, 혹은 사회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개신교 교회론에서 이러한 효과는 자주 간과된다. 전통적인 개신교 교회론은 교회를 각자 개인의 신앙을 소유한 개인들의 집단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교회론에서는 모임의 숫자에 대한 아무런 고려가 없다. 기본적으로 개신교 교회론에서 교회의 크기는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교인 숫자는 두세 사람이어도 상관없고, 수십만 명 이상이어도 상관없다. 숫자는 교회(신자의 모임)의 본질과 아무런 필연적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현대의 심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 모임이 되었든 임계점을 넘어 버린 거대한 군중은 그곳에 모인 개인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의 고유한 특질을 갖는다고 본다. 예컨대, 르봉은 말하기를 "군중을 형성하는 개인이 누구이건 이들의 생활양식, 직업, 성격, 교양이 비슷하건 비슷하지 않건, 그들이 군중으로 화(化)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일종의 집단 심리를 갖게 하며 여기에서 사람들은 평상시의 개인이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하게 된다(1990: 28)."
이러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모임의 숫자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숫자가 어느 수준을 넘어 버릴 때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그리고 쉽게 통제할 없는 군중 고유의 특질이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메가처치에 대해서 살필 때 고려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메가처치는 하나의 군중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군중으로서의 메가처치는 다른 종류의 군중과 마찬가지로 군중심리라는 심리적 특질을 갖는다.
그러한 심리적 특질 중 하나는 바로 기묘한 들뜬 기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메가처치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메가처치 예배는 마치 무슨 축제나 놀이공원 같은 뭔가 모를 고양된 흥분 상태가 그곳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차분하고 안정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들떠 있고, 고양되고,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업(up)되는 그런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교회다.
이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가 있다. 최근 워싱턴 주립대학교 연구팀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메가처치의 예배는 "초월 감각을 촉발시켜 뇌 속의 화학 성분을 바꾸어 줌으로써 마치 마약을 흡입했을 때처럼 '고조'(high) 상태를 지탱시켜 같은 교회로 되돌아오게 만든다"고 했다(<크리스천투데이>). 그리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교회 지도자들이나 예배 기획자들은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러한 효과를 증대하기 위해서 예배를 설계하게 된다. 그러는 중에 교인들은 메가처치의 분위기에 서서히 중독되게 된다.
"메가처치들은 대규모 회중 전체의 고조 상태의 조성을 위해 첨단 테크놀로지와 호소력 있는 진행 등의 방식을 활용한다고 코코런은 주장한다. 대형 화면에 비치는 현대적 음악, 미소, 춤, 노래와 환호, 강력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설교 등이 청중에게 이런 경지의 정서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대형 교회의 설교가들은 청중을 접근이 쉽고 정보적이고 감정적인 설교로 끌어들이는 '에너지 스타'역을 한다(<크리스천투데이>)."
메가처치의 이러한 들뜬 상태는 분명 대단히 독특하고 새로운 것이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메가처치의 이런 분위기를 우리의 향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옛날 시골 교회의 분위기와 한번 비교해 보자. 동네 어귀에 높은 종탑을 세우고 자리하던 시골 교회에서는 1년에 한두 번 하던 심령부흥회 때가 아니면 도무지 이러한 종류의 들뜬 상태를 경험할 수 없었다. 교회의 분위기는 늘 차분한 바닥 상태였다. 그리고 교인들은 이것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시골 교회라도 교회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주일학교 학생들에게는 신나는 공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 곳으로 기억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성탄절에 맛있는 간식을 기대하던 주일학교 학생들의 들뜬 기대감과 메가처치 예배당 전체를 꽉 채운 압도하는 흥분감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메가처치는 이런 들뜬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메가처치는 군중이고, 군중인 이상 군중심리를 가지며 그것에 휘둘린다. 군중심리를 형성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숫자다. 르봉은 군중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군중 속에 함몰 될 때 이 군중에게서 나타나는 첫 번째 특징을 "군중을 형성하는 개인은 오직 수적인 요인만을 생각한 나머지 수적인 힘을 느끼게 되고 혼자 있을 때는 억제했던 본능을 마구 발산한다"고 설명했다. 즉 사람들은 군중 속에서 숫자라는 강력한 힘을 발견하고 그 힘에 순식간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1990: 32).
그러니까 메가처치를 들뜬 상태로 만드는 이유는 바로 숫자인 셈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상태, 그 자체가 바로 그런 들뜬 상태를 창조하는 근본 원인이다. 월드컵 경기장에 모인 관중들은 자신들을 그토록 열광적이 되게 만드는 원인이 축구 경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실은 그곳에 그렇게 많은 숫자가 모여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들을 열광적이 되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자주 간과한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세기의 대결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관중이 기껏 여남은 명 정도 모여 있다면 그들은 결코 흥분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원리가 메가처치에도 적용된다. 왜 메가처치가 들뜬 상태일 수 있는가? 그건 간단하다. 많은 수가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메가처치 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씀이 좋다거나, 복음이 선포된다거나, 시스템이 좋다거나, 영혼 구원에 열심히 있다거나,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신다거나, 혹은 다른 이유를 갖다 대면서 그것 때문에 메가처치에서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단 그들을 그곳에 모이게 되면, 그들에게 가장 큰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이루고 있는 숫자다.
이 점에 대해서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설교를 하는 장소에 있게 되었다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설교라는 확신을 그가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누군가가 나서서 그에게 만족을 준 것은 설교 자체보다는 그곳에 참석한 청중의 숫자였다는 이론을 편다면 그는 놀라거나 아니면 아마도 화를 내었을 것이다(1982: 17)."
혹자는 메가처치가 그러한 들뜬 분위기를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문제 될 것이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사실 모든 공간과 장소는 각자 고유의 인상과 느낌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인상과 느낌, 분위기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모임의 성격, 내용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로마 시대의 카타콤과 가정 교회, 초기 기독교 예배당으로 차용되었던 바실리카, 무수히 많은 뾰족한 첨탑이 하늘까지 찌를 것 같은 중세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비롯한 동유럽의 그리스 정교회당, 혹은 러시아 정교회당 등은 각각의 고유의 분위기를 갖는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메가처치도 고유의 분위기를 갖는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간, 장소, 혹은 모임이 형성하는 분위기는 단순히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간과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한 느낌, 혹은 감정으로 치부될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월터 윙크(Walter Wink)는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다. "우리의 세계관은 극히 개인주의적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집단의 사람들을 그 자체의 유기적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저 개인들의 집합이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교회는 단순히 개인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유기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자체의 역사와 특성, 그리고 부르심을 가진 하나의 온전한 형태나 전체"다. (2005: 179-89)
따라서 교회를 바라볼 때 단순히 담임목사가 누구고, 그의 목회 철학이나 설교가 어떤지, 그리고 제자 양육 프로그램이나 경배와 찬양 스타일은 어떤지만 볼 것이 아니다. 그와 함께 건물과 장소, 인테리어, 사람의 수, 그들의 인종이나 계급, 권력 구조, 갈등 해결 방식 등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 (2005: 179-89) 그 모든 것들에 의해 창조되는 그 교회의 분위기는 바로 그 교회의 정신(spirit)의 반영이자, 영성(spirituality)의 투영이다.
이런 점에서 메가처치가 만들어 내는 독특한 분위기는 단순한 느낌이나 기분이 아니라 메가처치의 영적 실체와 분리될 수 없다. 특히 메가처치가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거대한 숫자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구자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월터 윙크식으로 말하자면 교회의 숫자는 그 교회의 영적 상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때문에 메가처치의 영성은 무엇보다도 숫자가 만들어 내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메가처치의 들뜬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자 하는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메가처치는 들뜬 상태를 지속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다. 하여 메가처치 담임목사나 사역자들은 그러한 들뜬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압박감에 늘 시달린다. 그것은 마치 저글링과 같다.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핀을 다시 공중으로 띄워 주고,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핀을 띄워 주어야만 하는 저글링 말이다. 앞의 <크리스천투데이> 기사를 한 번 더 인용해 본다.
"(메가처치의)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다음번의 히트를 위해 그때까지 기다리지는 못할 마약 같은 무엇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고조 상태를 다음 차례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거죠."
이러한 이유로 메가처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교회다. 메가처치는 마치 자전거처럼 멈출 수 없다. 움직여야 한다. 앞으로, 또 앞으로… 달리는 자전거처럼 멈추면 쓰러지는 것이 메가처치다. 메가처치는 계속 앞으로 움직이도록 닦달하는 교회다. 메가처치는 닦달당하는 교회, 곧 driven되는 교회다.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이 교회를 "목적이 이끄는 교회(purpose-driven church)"라고 표현했을 때 그는 이러한 추동력에 끌려가고 있는 메가처치를 정확히 잘 표현했다. 메가처치는 가만히 있는 교회가 아니다. 전진하는 교회다. 아니 전진해야만 하는 교회다. 하여 우리는 릭 워렌의 수사를 다양하게 응용해 볼 수 있다. 메가처치는 목적이 이끄는(purpose-driven) 교회임과 동시에 목표가 이끄는(goal-driven) 교회요, 성장이 이끄는(growth-driven) 교회요, 성공이 이끄는(success-driven) 교회며, 감정의 고조가 이끄는(pitch-driven) 교회다.
목적이 되었든, 목표가 되었든, 성장이나 성공이 되었든, 감정적 고양 상태의 유지가 되었든 간에 어쨌거나 메가처치는 그 뭔가에 의해서 질질 끌려가는(driven) 교회다. 교인이나 혹은 담임목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교회를 말아먹지 않으려면 담임목사나 사역자들은 그러한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하여 메가처치는 담임목사를 비롯해서 예배 스태프, 부교역자들, 평신도 지도자들, 그리고 온 교인들이 늘 어디론가 끌려 다니게 되는 정말로 피곤한 교회다.
우리는 여기서 메가처치가 성장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메가처치는 (그것이 옳든 그르든)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니, 지상 명령의 완수니,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전파 같은 신학적 당위 때문에 성장을 외친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들 외에도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에 성장을 강조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체의 존속을 위해서다. 메가처치는 존속하기 위해서 성장을 추구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로버트 슐러 목사의 교회성장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로버트 슐러는 교회가 이미 충분히 커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아무렇게나 숫자를 정해서 그것이 교회의 이상적인 크기로 생각하는 것은 중국의 전족(纏足)과 같다고 말한다. 커가는 아이의 발을 더 이상 크지 못하게 묶어 버리는 잔인한 중국의 풍속처럼 교회의 적당한 크기를 가정하는 것 역시 성장하는 교회에 일부러 속박을 가하는 어리석고 잔인한 짓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강조한다. "교회가 성장을 멈출 때 그것은 죽기 시작할 것입니다(1988: 201-2)."
그는 자주 "교회는 성장하든지 아니면 소멸하든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장하지 않으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슐러에게 있어서 성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1988: 198) 그리고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메가처치는 수시로 그러한 양자택일 앞에 서게 된다. 그러니까 슐러는 성장할 것이냐, 소멸할 것이냐를 양자택일해야 하는 메가처치의 곤경을 잘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메가처치가 소멸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성장하기로 결정한다는 뜻이다. 또 만일 성장하기로 결정한다면 교회는 정장의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위해 전심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만일 교회가 계속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교회는 계속해서 목표치를 상향 조정하며 교인들을 독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만일 교회가 100명을 목표로 전도해서 성장했다면, 곧바로 목표를 300명으로 수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목표가 달성되면 다시 500명으로, 1000명으로, 1만 명으로 목표를 수정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계속 목표를 수정해서 교인들 앞에 제시해야만 그 목표를 향해 교인들을 동력화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슐러의 교회성장학의 요지다.
하기는 그렇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아무런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는 메가처치를 말이다. 교인들이 헌신해야 할 뭔가가 없는 메가처치, 자신의 시간과 돈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대의(大義)가 없는 메가처치, 모든 교인에게 뚜렷하고 분명한 목표점이나 방향성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메가처치… 이런 메가처치가 탄력을 받을 수 있겠는가? 아니 과연 존속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로버트 슐러는 성장의 목표가 없는 메가처치는 붕괴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슐러의 교회성장학은 군중심리학의 통찰과 일치한다. 카네티는 군중심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성장의 충동이라고 했다. "군중은 일단 존재하게 되면 즉시 더 많은 숫자의 인간들에 의해 채워지기를 바란다. 즉 증대의 충동은 군중의 제일의 특성이자 최대의 특성이다(1982: 11)." 여기서 우리는 메가처치의 무한한 확장욕을 바라보는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을 가지게 된다. 메가처치의 무한한 성장 욕망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거대한 숫자로 모인 군중들의 심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메가처치 현상을 목사 개인의 불온한 세속적 야망과 성공욕에만 국한시켜서 비판해 왔던가. 하지만 메가처치의 성장 욕망의 훨씬 더 중요한 근원은 메가처치 교인들, 곧 그들이 군중을 이루고 모여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군중은 속성상 성장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성장을 멈추면 군중은 와해된다. "증대를 중지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의 붕괴가 시작된다(1982: 11)." 언제까지 성장하고 싶어 하는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포획할 때까지다. "세계 종교가 노리고 있는 것은, 처음에는 손을 뻗쳐서 획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이든 간에 손을 내밀어 포섭하는 데에 있다. 세계 종교가 우선 머리에 그리는 군중이란 보편적인 것이다. 온갖 개인의 영혼이 모두 세계 종교의 대상이 되며 모든 영혼은 세계 종교가 소유하는 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1982: 22)."
메가처치 현상은 바로 이러한 군중심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메가처치는 주변의 모든 포섭 가능한 사람들을 자기 구성원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과 국가, 나아가 전 세계 모든 외부인들을 몽땅 다 포섭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군중의 제국주의적 탐욕은 가장 근본적인 군중심리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러한 군중심리가 메가처치 현상을 추동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힘이다.
참고목록
Canetti, Elias. (1982). <군중과 권력>. 반성완 역. 서울: 한길사.
Le Bon, Gustave. (1990). <군중심리>. 전남석 역. 서울: 동국.
Schuller, Robert. (1988). <성공적인 교회성장>. 권명달 역. 서울: 보이스사.
Wink, Walter. (2005).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 박만 역. 고양: 한국기독교연구소.
"대형 교회 예배는 마치 마약처럼 기분'UP'" <크리스천투데이>. (2012. 8. 29.)
http://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20442§ion=section4§ion2
신광은 / 대전 열음터교회 담임목사·<메가처치 논박>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