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운형 칼럼] 중우정치(衆愚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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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2-11-30 10:21 / 조회 2,903 / 댓글 0본문
중우정치(衆愚政治)
중우정치(衆愚政治).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가 사랑했던 스승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희생자였다. 유죄 280표 무죄 220표.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담당했던 아테네 500인의 배심원단은 위대한 철학자에게 유죄 판결을, 그리고 사형을 선고했다.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충동에 의하여 좌우되는 미련한 대중들의 정치’라며 혐오한 이유는 그 한 건의 오판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아테네 민주주의는 타락한 정치 체제의 극치였다. 아테네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두 기구(機構)의 타락이 이를 증명한다.
먼저 500의 배심원이 판결했던 법정의 타락이다. 다수결로 죄의 유무를 가리던 아테네 법정은 법률이나 사안에 대한 지식도 없으면서 수당을 타려는 노인들로 채워졌다고 한다. 자신들이 심의하는 사안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순간의 감정에 이끌려 표를 던지는 고장난 거수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 재판 당시 무죄를 인정했던 220명 중에 80여 명이 그의 형량을 결정할 때에는 사형에 표를 던진 것이 전형적 사례이다.
다음으로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여 아테네 최고 결정권을 행사했던 기구인 민회(Ecclesia)의 타락이다. 이 회의에서는 조금이라도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정책은 부결되었다고 한다. 국가 전체에는 유익하지만 각 개인이 손해를 감내해야 하는 그런 정책들이 번번이 부결됐기에 공동체의 미래가 어떠할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건전한 미래상을 제시하는 정치가보다 화려한 말솜씨로 대중을 호도하는 ‘정치꾼’들이 득세하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타락한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이후 급속히 쇠퇴하고 만다.
9월을 맞아 다시 돌아온 교단 총회를 바라보며 아테네의 역사를 떠올려본다. 작금 한국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판단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교회의 쇠락을 안타까워하는 탄식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교회의 세속화와 쇠락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물론 한국교회의 교인이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목회자들, 특히 교단의 중대사를 결정할 권한을 위임 받은 총회 대의원들에게는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총회가 건강하게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에, 다시 말해 총회의 타락이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필자는 지난 수년 간 총회를 참관하면서 앞서 언급한 아테네의 두 기구를 보는 듯한 기시감(旣視感)을 느꼈다. 어느 해, 총회에서 매주 중요한 안건이 다뤄지는 것을 봤다. 그러나 사안은 깊이 있게 논의되지 못했다. 오히려 감정적 언쟁으로 번졌고 종국엔 시간에 쫓겨 모호한 결정으로 끝맺고 말았다. 다음 해에도 그 안건은 다시 올라왔고, 총대들은 마치 처음 마주한 사안인 양(未視感) 똑같은 언쟁을 벌이다가 비슷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 다음 해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현상은 대다수의 총대들이 상정된 안건에 대한 이해나 배경 지식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 같다. 현재 총회의 구조상 총대 스스로 연구하고 찾아보지 않는다면 안건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그러니 ‘그냥’ 회의에 참석한 대다수의 총대들은 ‘논의’를 하기 보다는 단순한 ‘설명’을 듣고, 표결에 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 표결의 방향은 사안의 본질에 따른 판단보다는, 본질을 호도하려는 소수 발언자들에 의해 휘둘릴 위험이 있다. 여기서 ‘정치가’가 아닌, ‘정치꾼’이 활약할 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총대들께 부탁드린다.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의 제직회나 당회 이상의 애정을 가지고 회무에 참석하시길.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깨어 있는 의식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중우정치가 될 위험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과 한국교회가 이 체재를 채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각각의 백성들을 통해 그분의 뜻이 이뤄질 것을 믿고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총회가 이러한 신실한 믿음 위에 깨어 있는 총대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민주적 회의가 되기를 바란다.
(원문보기)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77025
중우정치(衆愚政治).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가 사랑했던 스승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희생자였다. 유죄 280표 무죄 220표.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담당했던 아테네 500인의 배심원단은 위대한 철학자에게 유죄 판결을, 그리고 사형을 선고했다.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충동에 의하여 좌우되는 미련한 대중들의 정치’라며 혐오한 이유는 그 한 건의 오판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아테네 민주주의는 타락한 정치 체제의 극치였다. 아테네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두 기구(機構)의 타락이 이를 증명한다.
먼저 500의 배심원이 판결했던 법정의 타락이다. 다수결로 죄의 유무를 가리던 아테네 법정은 법률이나 사안에 대한 지식도 없으면서 수당을 타려는 노인들로 채워졌다고 한다. 자신들이 심의하는 사안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순간의 감정에 이끌려 표를 던지는 고장난 거수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 재판 당시 무죄를 인정했던 220명 중에 80여 명이 그의 형량을 결정할 때에는 사형에 표를 던진 것이 전형적 사례이다.
다음으로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여 아테네 최고 결정권을 행사했던 기구인 민회(Ecclesia)의 타락이다. 이 회의에서는 조금이라도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정책은 부결되었다고 한다. 국가 전체에는 유익하지만 각 개인이 손해를 감내해야 하는 그런 정책들이 번번이 부결됐기에 공동체의 미래가 어떠할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건전한 미래상을 제시하는 정치가보다 화려한 말솜씨로 대중을 호도하는 ‘정치꾼’들이 득세하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타락한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이후 급속히 쇠퇴하고 만다.
9월을 맞아 다시 돌아온 교단 총회를 바라보며 아테네의 역사를 떠올려본다. 작금 한국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판단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교회의 쇠락을 안타까워하는 탄식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교회의 세속화와 쇠락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물론 한국교회의 교인이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목회자들, 특히 교단의 중대사를 결정할 권한을 위임 받은 총회 대의원들에게는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총회가 건강하게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에, 다시 말해 총회의 타락이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필자는 지난 수년 간 총회를 참관하면서 앞서 언급한 아테네의 두 기구를 보는 듯한 기시감(旣視感)을 느꼈다. 어느 해, 총회에서 매주 중요한 안건이 다뤄지는 것을 봤다. 그러나 사안은 깊이 있게 논의되지 못했다. 오히려 감정적 언쟁으로 번졌고 종국엔 시간에 쫓겨 모호한 결정으로 끝맺고 말았다. 다음 해에도 그 안건은 다시 올라왔고, 총대들은 마치 처음 마주한 사안인 양(未視感) 똑같은 언쟁을 벌이다가 비슷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 다음 해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현상은 대다수의 총대들이 상정된 안건에 대한 이해나 배경 지식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 같다. 현재 총회의 구조상 총대 스스로 연구하고 찾아보지 않는다면 안건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그러니 ‘그냥’ 회의에 참석한 대다수의 총대들은 ‘논의’를 하기 보다는 단순한 ‘설명’을 듣고, 표결에 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 표결의 방향은 사안의 본질에 따른 판단보다는, 본질을 호도하려는 소수 발언자들에 의해 휘둘릴 위험이 있다. 여기서 ‘정치가’가 아닌, ‘정치꾼’이 활약할 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총대들께 부탁드린다.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의 제직회나 당회 이상의 애정을 가지고 회무에 참석하시길.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깨어 있는 의식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중우정치가 될 위험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과 한국교회가 이 체재를 채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각각의 백성들을 통해 그분의 뜻이 이뤄질 것을 믿고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총회가 이러한 신실한 믿음 위에 깨어 있는 총대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민주적 회의가 되기를 바란다.
(원문보기)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77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