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종운 칼럼] 나눔, 연약한 이웃을 일으켜 세우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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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2-03-16 11:00 / 조회 3,217 / 댓글 0본문
나눔, 연약한 이웃을 일으켜 세우는 교회
저는 법률가라는 직업적 소명을 품고 법률 영역에 파송된 자비량 선교사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질적, 양적으로 확산시키는 운동을 하는 사회선교사이기도 합니다.
강연의 제목을 ‘나눔, 연약한 이웃을 일으켜 세우는 교회’라고 정했는데 ‘나눔, 연약한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이웃’이라고 읽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이웃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정작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고 교회답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눔에 대한 세 가지 관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최고의 계명으로서의 관점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4~40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최고의 계명으로 보셨습니다. 유교식으로 표현하면 경천애인(敬天愛人)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십자가를 예로 들어 수직적 사랑과 수평적 사랑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아가페적 사랑과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사랑이 십자가 중심의 수직적 사랑입니다. 수평적 사랑은 한마디로 평등한 사랑입니다. 이는 형평케 하는 사랑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핵심 요소는 나눔과 섬김입니다. 수평적 사랑 뿐 아니라 수직적 사랑에도 나눔과 섬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겉과 속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나눠주기를 바라십니다. 대천덕신부님께서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하나님과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셨다고 합니다. 이처럼 나눔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필요합니다. 이웃사랑에서의 섬김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낮아짐으로서 십자가의 수평을 맞추고 상대를 높여 섬긴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나누고 베푸는 일은 다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나눔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관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입니다. 주기도문에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법률적으로, 국가의 3요소는 국민, 영토 그리고 주권입니다. 이는 하나님나라에도 적용되는데 성도가 국민이고 온 우주만물과 인간, 자연 등 창조세계 전체와 법률, 정치 등 영역들도 영토에 포함됩니다. 나의 주권은 구세주이시고 주인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주권이 관철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민국 통치에 순종하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을 내 삶의 전 영역에서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소한 집안일을 하거나 회사에서 일하거나 물건을 만들 때도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고민하는 것이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예수그리스도를 가둬놓고 주일날만 면회하는 삶은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지의 여부는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가치관, 즉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가 그 사람 속에 관철되느냐에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옛날 약육강식의 시계에서 구약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평등을 나타내는 획기적이고 진보적인 법률 이었습니다. 희년법의 경우도 당시 획기적인 법률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예수님께서는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라며 화해와 평등의 법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로, 사랑과 공의를 통해 형평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샬롬(평화)을 실현하게 됩니다. 궁극적 목적은 ‘평화’인 것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보면 사자의 강포한 성격이 성령의 은사로 변화되어 어린양과 같이 뛰노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요즘 기업형 슈퍼마켓이 자본으로 밀어붙여 중소상인들을 해치는 행위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기본 형태에 해당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명백한 잘못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사회선교적 관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사명은 사람, 인종, 국가 등 어떠한 차별 없이 다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사회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위해 우리는 누구에게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뭐겠습니까?
2007년 아프간 사태 때 샘물교회 교인들이 간 행위가 봉사냐 선교냐를 두고 기독인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당시 그들이 가서 한일은 봉사였기 때문입니다. 광의로서의 선교는 하나님이 주체로서 인류를 위해 하시는 모든 일입니다. 선교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총체적으로 이해하면 사회참여나 봉사도 다 선교에 해당됩니다. 협의로서의 선교는 교회가 주체로 타 문화권에 가서 직접적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프간 사태의 경우 협의의 선교는 아니지만 광의에서는 선교의 범주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보면 선교의 의미에 대해 “모든 족속으로 제자들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유는 교인들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성경을 가르쳐 지키게 하고 내가 먼저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사랑과 공의, 나눔과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원을 거치는 탈북자들의 70~80%가 기독교를 선택하는 이유는 교회의 익숙함도 있지만, 김일성 부자를 우상화하는 북한의 주체사상이 기독교와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가 탈북자들을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들이 탈북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돈을 줍니다. 돈 때문에 교회 출석한 탈북자는 더 많은 돈을 주면 다른 교회로 가버립니다. 돈으로는 절대 신앙을 살 수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탈북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감동을 주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에 부자를 도와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가난한 자들은 구제하고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만 되시기 때문일까요? 그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시지만 특히 사회경제적인 약자들을 향한 사랑이 크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평케 하시는 사랑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사회선교적 관점에서는 부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2000년도에 사법고시에 합격할 당시 법조계의 질적인 복음화와 북한선교 이 두 가지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복음화가 양적으로는 이루어졌지만 질적으로 법조계 크리스천들이 진짜 크리스천 법률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예수사랑변호사모임’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매주 모임마다 교회와 다름없이 성경공부와 강의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달 후 저는 “기독교법률가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따라 살고 싶다”고 제언하였고 함께 고민하여 사명선언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핵심은 법률 영역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삶 살기를 결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과를 만들어 성경의 희년제도와 세상법보다 훨씬 높은 윤리에 대해 고민하고 기독교 NGO, 탈북자, 이주노동자, 난민, 장애인을 법률적으로 돕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법률 상담뿐 아니라 법제도 개선에도 관여하여 난민법, 장애인 차별금지법 등을 제정했고 통일 관련 법 제정을 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이주노동자관련이었고 기독단체들과 연계하여 난민 지원을 하다가 현재는 장애인 관련 일들을 하고 있고, 앞으로는 양극화 문제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나눔에는 개인적 나눔과 구조적 나눔이 있습니다. 부랑자에게 당장 돈을 주는 것과 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개혁하는 것 둘 다 나눔입니다. 내게 나누어 줄 의무가 있기 때문에 이웃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머물지 말고 구조적으로도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만족이나 공명심에 의한 나눔은 형평케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나눔을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예수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나누고 베풀고 선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로인해 사람들을 감동을 줄 수 있으며, 그것이 진짜 선교입니다.
원문보기
http://www.thevoice.kr/news/articleView.html?idxno=811
저는 법률가라는 직업적 소명을 품고 법률 영역에 파송된 자비량 선교사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질적, 양적으로 확산시키는 운동을 하는 사회선교사이기도 합니다.
강연의 제목을 ‘나눔, 연약한 이웃을 일으켜 세우는 교회’라고 정했는데 ‘나눔, 연약한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이웃’이라고 읽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이웃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정작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고 교회답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눔에 대한 세 가지 관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최고의 계명으로서의 관점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4~40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최고의 계명으로 보셨습니다. 유교식으로 표현하면 경천애인(敬天愛人)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십자가를 예로 들어 수직적 사랑과 수평적 사랑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아가페적 사랑과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사랑이 십자가 중심의 수직적 사랑입니다. 수평적 사랑은 한마디로 평등한 사랑입니다. 이는 형평케 하는 사랑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핵심 요소는 나눔과 섬김입니다. 수평적 사랑 뿐 아니라 수직적 사랑에도 나눔과 섬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겉과 속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나눠주기를 바라십니다. 대천덕신부님께서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하나님과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셨다고 합니다. 이처럼 나눔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필요합니다. 이웃사랑에서의 섬김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낮아짐으로서 십자가의 수평을 맞추고 상대를 높여 섬긴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나누고 베푸는 일은 다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나눔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관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입니다. 주기도문에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법률적으로, 국가의 3요소는 국민, 영토 그리고 주권입니다. 이는 하나님나라에도 적용되는데 성도가 국민이고 온 우주만물과 인간, 자연 등 창조세계 전체와 법률, 정치 등 영역들도 영토에 포함됩니다. 나의 주권은 구세주이시고 주인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주권이 관철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민국 통치에 순종하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을 내 삶의 전 영역에서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소한 집안일을 하거나 회사에서 일하거나 물건을 만들 때도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고민하는 것이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예수그리스도를 가둬놓고 주일날만 면회하는 삶은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지의 여부는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가치관, 즉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가 그 사람 속에 관철되느냐에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옛날 약육강식의 시계에서 구약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평등을 나타내는 획기적이고 진보적인 법률 이었습니다. 희년법의 경우도 당시 획기적인 법률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예수님께서는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라며 화해와 평등의 법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로, 사랑과 공의를 통해 형평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샬롬(평화)을 실현하게 됩니다. 궁극적 목적은 ‘평화’인 것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보면 사자의 강포한 성격이 성령의 은사로 변화되어 어린양과 같이 뛰노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요즘 기업형 슈퍼마켓이 자본으로 밀어붙여 중소상인들을 해치는 행위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기본 형태에 해당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명백한 잘못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사회선교적 관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사명은 사람, 인종, 국가 등 어떠한 차별 없이 다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사회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위해 우리는 누구에게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뭐겠습니까?
2007년 아프간 사태 때 샘물교회 교인들이 간 행위가 봉사냐 선교냐를 두고 기독인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당시 그들이 가서 한일은 봉사였기 때문입니다. 광의로서의 선교는 하나님이 주체로서 인류를 위해 하시는 모든 일입니다. 선교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총체적으로 이해하면 사회참여나 봉사도 다 선교에 해당됩니다. 협의로서의 선교는 교회가 주체로 타 문화권에 가서 직접적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프간 사태의 경우 협의의 선교는 아니지만 광의에서는 선교의 범주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보면 선교의 의미에 대해 “모든 족속으로 제자들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유는 교인들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성경을 가르쳐 지키게 하고 내가 먼저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사랑과 공의, 나눔과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원을 거치는 탈북자들의 70~80%가 기독교를 선택하는 이유는 교회의 익숙함도 있지만, 김일성 부자를 우상화하는 북한의 주체사상이 기독교와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가 탈북자들을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들이 탈북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돈을 줍니다. 돈 때문에 교회 출석한 탈북자는 더 많은 돈을 주면 다른 교회로 가버립니다. 돈으로는 절대 신앙을 살 수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탈북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감동을 주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에 부자를 도와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가난한 자들은 구제하고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만 되시기 때문일까요? 그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시지만 특히 사회경제적인 약자들을 향한 사랑이 크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평케 하시는 사랑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사회선교적 관점에서는 부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2000년도에 사법고시에 합격할 당시 법조계의 질적인 복음화와 북한선교 이 두 가지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복음화가 양적으로는 이루어졌지만 질적으로 법조계 크리스천들이 진짜 크리스천 법률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예수사랑변호사모임’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매주 모임마다 교회와 다름없이 성경공부와 강의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달 후 저는 “기독교법률가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따라 살고 싶다”고 제언하였고 함께 고민하여 사명선언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핵심은 법률 영역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삶 살기를 결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과를 만들어 성경의 희년제도와 세상법보다 훨씬 높은 윤리에 대해 고민하고 기독교 NGO, 탈북자, 이주노동자, 난민, 장애인을 법률적으로 돕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법률 상담뿐 아니라 법제도 개선에도 관여하여 난민법, 장애인 차별금지법 등을 제정했고 통일 관련 법 제정을 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이주노동자관련이었고 기독단체들과 연계하여 난민 지원을 하다가 현재는 장애인 관련 일들을 하고 있고, 앞으로는 양극화 문제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나눔에는 개인적 나눔과 구조적 나눔이 있습니다. 부랑자에게 당장 돈을 주는 것과 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개혁하는 것 둘 다 나눔입니다. 내게 나누어 줄 의무가 있기 때문에 이웃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머물지 말고 구조적으로도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만족이나 공명심에 의한 나눔은 형평케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나눔을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예수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나누고 베풀고 선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로인해 사람들을 감동을 줄 수 있으며, 그것이 진짜 선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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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hevoice.kr/news/articleView.html?idxno=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