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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양희송 칼럼] 봉은사 신도들과 명진 스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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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10-10-27 11:45 / 조회 3,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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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scha.nodong.net/bbs/data/free/ky1105.js></script>        봉은사 신도들과 명진 스님, 죄송합니다 
 
1.
저는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사회에서 종교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것을 매우 걱정하고 있는 한 개신교인입니다. 몇몇 개신교인들이 봉은사에 들어가서 공공연히 기도하고, 불교 신도들에게 매우 무례한 발언을 하는 동영상을 오늘 보았습니다. 입장 바꾸어 생각해보면 만약 어떤 교회에 타 종교 신자들이 몰래 들어와 교회당 곳곳에다 부적을 붙이거나, 건물이 무너지고, 공동체에 분란이 생겨서 자신들의 종교가 흥왕하도록 기도를 하고 갔다면, 그리고 그런 동영상을 돌려보면서 그런 행위를 더욱 열심히 하도록 독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 교회 목사님이 할 일이 '한번 껄껄 웃고 말 일'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이해할 만한 일이며, 당사자인 봉은사 신도들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바로 잡아야 한다고 느낄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조만간 당사자들이 사과를 하거나, 소위 개신교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나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같은 기구들이 나서서 유감을 표명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사건은 이미 당사자들의 개별 해프닝을 넘어 개신교 전반의 문제로 번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제도적 기구가 개신교인 개인의 신앙 의지를 다 대변하지는 못합니다. 개신교(改新敎)는 개신교(個信敎)이기도 합니다. 저는 차라리 이번 사건을 정말 불쾌하게 느끼고 사과를 할 마음이 있는 개신교인 개인들이 자기 진심을 전달하는 것이, 공식적 유감 표명 따위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라 생각하게 되어 이렇게 글을 씁니다.

2.
우선 저는 이번 일을 '일부 몰지각한' 이들의 짓으로 규정하면서 개신교 전반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피해 가려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올 것이 왔고, 드러날 것이 드러났을 뿐입니다. 드러나서 문제가 될 것이라면 숨어서 해도 문제가 될 일입니다. 이런 유의 행동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대해 사건의 당사자들에 앞서 저 자신부터 먼저 반성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동영상에 나오는 것은 사실 저 같은 사람들이 20여 년 전에 열심히 했던 일들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 간 갈등, 특히 개신교와 불교의 갈등은 '우상 숭배' 등의 논란 속에 이어져 온 해묵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대적 기도'를 한다든지, '땅 밟기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식의 공격적 양상을 띠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점점 대중적으로 강화되고 확산되어 온 흐름입니다. 제가 대학 시절 다닌 교회는 찬양 운동을 열심히 하는 곳이었는데, 양상은 조금 달랐을지 모르나 여름이나 겨울 방학이면 국내외로 장기간 전도 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그 지역의 '영적 분위기'를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의 존재를 '영적 도해(spiritual mapping)'로 파악하고, 핵심 진지에 대한 '대적 기도'를 하는 것으로 전도 여행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이런 전도 여행(선교 여행)은 참가자들에게 매우 강한 신앙 훈련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군사'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나태한 일상을 새롭게 다잡는 계기가 되곤 했습니다. 저 스스로 이런 과정을 거쳐 신앙이 어느 정도 자라났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교회에서 대중적 선교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90년대 이후, 교회 내에서는 '영적 전쟁'을 독려하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점점 더 보편화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나가면 그것이 이슬람권이든, 힌두권이든, 불교권이든, 공산주의 국가이든, 다 기도로 그 땅의 악한 영을 무찌르고, 영적 승리를 선포해야만 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런 생각과 기도의 행태는 매우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었기에 남 탓을 하기에 앞서 스스로 이런 문제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선행해야 마땅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3.
제 경우에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제 신앙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내 신앙의 진리 값을 타인의 신앙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입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이기 위해서 상대는 악마의 자식이 되어야만 한다면 그 진리는 '홀로 설 수 없는 진리'일 것입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늘 '외부의 적'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이분법적 관행은 우리를 쉽게 영혼의 불구로 만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정작 싸워야 할 내부의 죄에 대해서는 관용적이 되었고, 외부의 타자를 향해서는 과도하게 배타적이 되어 '표리부동한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위선적이란 평가를 벗어나려면 이런 행태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둘째, 언어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면서, 적절한 신앙 언어를 갖지 못한다면 신앙은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봉은사에서 일어난 '땅 밟기 기도'는 미숙함이 빚어낸 사건이자 하나의 해프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제는 숨길 수 없이 한국 개신교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린 '공격적 선교'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런 언어는 단지 상징적인 언어에 불과한 것이지 실질적으로 타 종교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는 점점 더 절실하게 느낍니다. '인식론적 폭력이 물리적 폭력으로 전환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개신교 신앙 언어에 너무나 빈번이, 그리고 깊숙이 들어와 있는 '전투적 용어'들은 먼저 우리의 심성에 전투적 정서를 고양시킵니다. 그런 정서를 오랜 시간 접하고, 그것이 자연스러워지면 그것이 곧 내적 태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것이 개인과 집단의 정서를 형성하게 되면 어느 순간 그것이 물리적으로 표현되었을 때 그것을 불편하거나, 잘못이라고 여기는 내적 저항감이 이미 사라지고 없기에 아무런 제동 장치 없이 튀어 나가게 마련입니다. '영적 전쟁'을 내면화하고 자신을 '영적 전사'로 강렬히 인식하는 상황에서는 '언어적 폭력'이 자연스레 저질러지고, '정복하려는 의지'가 제2의 본성이 되고 맙니다. 개신교권의 이런 전투적 태도는 부인할 수 없이 이슬람권이나, 북한이나, 제3세계 이민자들을 향해 쉽게 폭력적으로 표출됩니다. 저는 개신교가 사력을 다해 '사랑, 평화, 화해, 용서, 희생, 회개, 낮아짐' 등의 단어가 신앙의 중심 언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전도나 선교는 본질상 내 신앙을 상대에게 강요해서 얻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을 통해 나타난 개신교 신앙의 핵심에는 '종교의 자유' 혹은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침해할 수 없는 권리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하는 것 자체는 개신교 신앙을 그 근본부터 훼손하는 '자기 부정'이 되고 맙니다. 물론 서양 역사는 숱한 종교 전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만, 적어도 그런 역사를 지나면서 개신교는 스스로가 다수 종교이건 소수 종교이건 간에 그 사회에서 '종교의 자유'를 신장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개신교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런 자명하게 알아온 전통이 어이없이 훼손되는 듯한 경우를 자주 접하면서 "개신교가 특혜를 봐서 좋다"는 인식보다 "우리가 알던 개신교 신앙은 이렇지 않다"는 낯설음이 적지 않았습니다.

4.
불교와 개신교가 만날 때, 불교의 가장 좋은 모습과 개신교의 가장 나쁜 모습을 대비시키거나, 반대로 불교의 가장 나쁜 사례와 개신교의 가장 좋은 측면을 비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종교 간 교세 경쟁의 양상으로 만날 때면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곤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두 종교가 진리의 대결이란 것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교와 개신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놓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은밀히 뒤로 상대를 거꾸러뜨리자는 식은 어떤 관점으로 보아도 정당화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한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용서를 구하고, 깊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양희송 / 청어람 대표 기획자,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원문주소: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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