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당신이 다니는 교회는 어떠한가? (평화나무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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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25-04-22 17:32 / 조회 49 / 댓글 0본문
“어떤 교회는 뜨거운 예배가 있고, 어떤 교회는 잔잔하면서도 깊은 설교가 전해지고, 어떤 교회는 상담을 통해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며, 어떤 교회는 광장에 머물며 약자들과 함께하고, 어떤 교회는 복음의 끝자락으로 나가 선교한다… 어떤 교회는 막 시작하여 생기가 있고, 어떤 교회는 오래도록 정체되어 쿰쿰한 냄새가 난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는 어떠한가?
하드웨어(Hardware) 중심의 교회
교회의 변화와 성장을 뒷받침하던 것들이 있는데 과거에는 교회 변화의 중요 요소가 ‘하드웨어(Hardware)’에 있었음은 틀림없다. 물리적 성장을 추구하던 시기에 하드웨어의 준비는 교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건이었다.
쾌적한 예배당, 수준 높은 교육관, 널찍한 주차장은 필수처럼 여겨졌다. 건물의 크기와 좌석 수가 곧 교회 성장의 동력이었다. 그때는 교회 개척하고 열심을 낸다면 어느 정도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나아가 땅을 매입하는 것에 교회는 사활을 걸었다. 땅만 있으면, 땅을 담보로 건축물을 올리고, 몇 개 층을 임대로 내놓으면서 은행 이자와 대출을 갚아나가는 전략을 많은 교회가 이용했다. 하드웨어만 갖추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었다.
대형 교회를 다니던 사람도 가까운 개척교회로 옮기는 사례가 빈번했고, 사회의 경제적 호황기여서인지 개척교회에 몇 안 되는 성도여도 재정적으로 버틸 수 있었다.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동네를 돌며 발품 팔아 전도하면 어떻게든 교회를 채워 나가던 시기였다.
교회가 변화하는 것은 곧 예배당이 넓어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예배의 변화는 예배당에 어마어마한 음향시스템을 갖추는 것에서 시작했고, 교육의 변화는 막대한 재정투자로 높은 퀄리티의 간식과 고품질(?) 캠프가 도맡았다. 지친 영혼을 위한 교회의 변화는 수련원을 짓는 것이었다. 산 좋고, 물 좋으며, 공기 좋은 곳에 건물을 지었다. 산허리를 잘라 도로를 건설했다.
교회의 변화는 건물을 짓거나, 더 넓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었고, 그것이 성장이자 성숙이며, 개혁이라고 불렀다.
소프트웨어(Software) 중심으로 전환하다.
교회의 건물이 크다고 해서 교회가 건강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하였다. 특별히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교회의 건물 안에 담긴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는 제자 훈련, 셀 교회, 가정교회, 리더십 등의 다양한 주제와 소프트웨어가 휘몰아쳤다.
관계 중심의 신앙 공동체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교회는 동분서주 했고, 성경과 신앙을 탐구하는 모임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성도에 대한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을 장착하지 않은 교회는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 등록한 사람을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새 신자와 수평으로 교회를 이동해 온 새가족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교회 내에서 평신도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년에 걸친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했다. 물론 이런 과정이 모두 성공적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교회에 가득했다.
교회 예배는 다양한 악기와 함께 다양한 포맷이 등장했고, 현장 예배뿐만 아니라 온라인 예배가 기획되었다. 설교자는 한 공간에서 같은 숨을 쉬는 사람이 아니라 평면의 화면 속에 머문 사람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교회 교육은 한계치에 다다랐다고 할 만큼 다양한 교재와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교회의 변화는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데 있음을 깨달았고,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가르치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것은 가르치는 사람과 그의 책을 맹신하도록 인도했으며, 특정한 교육을 이수한 유사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교회는 이 부류에 들어가 정착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변화는 ‘효율성’이라는 것 앞에서 위축되었고, ‘다양성’이라는 것 앞에서 길을 잃었다. 어떤 경계를 지나는 순간 교회의 성도조차 소프트웨어를 성공시키기 위한 효율성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나아가 계획된 프로세스에서 벗어나려 할 때에 그것은 악성 애드웨어나 바이러스 같은 것으로 취급당해야 했다. 프로세스는 정직하기에 이를 따르지 않는 변수는 허락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의 한계 | 하드웨어(Hardware)와 소프트웨어(Software)의 거리감
관계 중심적인 소프트웨어를 장착하려는 교회 공간이 전혀 관계 중심적일 수 없는 공간을 가지고 있거나, 첨단 미디어를 바탕으로 현대적인 예배 형식을 갖추었지만, 피상적 공동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가 늘었다. 관객이 되어, 예배와 교회 그리고 신앙조차도 소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성도가 등장했다.
공간은 카페이자 도서관인데 그 안에서의 사람과 예전은 공간과 연결되지 않는 오래된 방식일 때 어떤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거꾸로 하드웨어가 매우 경직된 구조임에도 교회가 관계적인 소프트웨어를 풀어보려 할 때 관계가 다시 경도되는 사례도 있었다.
교회의 하드웨어(Hardware)와 지금까지의 소프트웨어(Software)를 넘어선 교회다움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계를 경험했다.
“다른 교회는 잘 되는 것 같은데 우리 교회는 왜 이렇게 힘들까?”
“우리 교회는 이런 것이 쉬웠는데 배워간 저 교회는 왜 어려워할까?”
“똑같이 했는데 우리 교회는 왜 안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하드웨어(Hardware)와 소프트웨어(Software) 간의 거리감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 거리감은 각 교회만의 독특한 ‘캐릭터(Character)’가 만드는 것이었다.
개혁과 변화는 ‘캐릭터(Character)’를 아는 데서 시작한다.
교회는 각각의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다. 지역, 문화, 구성의 중심이 되는 세대, 리더십 등이 서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 캐릭터를 형성한다. 보편적인 신앙고백과 성경의 가르침이 중심이어도, 그것을 표현하고 이루어가는 교회는 서로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교회를 구성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캐릭터 위에서 작동한다. A 교회에서 잘 정착한 의사소통 체계가 B 교회에서는 적응하는 데 실패하기도 하고, C 교회에서는 성도로부터 관심받지 못한 교육이 D 교회에서는 신앙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례는 두 교회의 캐릭터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캐릭터의 다름이 유사한 하드웨어와 동일한 소프트웨어를 가지고서도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교회의 자기 점검과 자기 인식으로 우리 교회의 캐릭터를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다음의 변화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공동체성’이 강한 교회라면, 공동체성이 가지는 좋은 역량을 개발하면서도, 강한 공동체성이 가지는 약한 접근성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책과 지식을 탐구’하는 것에 강점이 있는 교회라면, 어떤 방향으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면서도 지식이 실천으로 꾸준히 전환하게 하는 목회 구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 선교적 역량’이 강한 교회라면, 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촘촘한 활동을 지원하면서도 개인의 깊은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교회 내부 역량을 도모하는 방향도 의미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다양한 교회의 캐릭터를 기반으로 복합적인 것들이 상호작용을 한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는 어떠한가?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는 어떠한가? 개혁하고 변화하자고 깃발을 드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왜 바꾸지 못할까 노심초사하고, 나의 공동체를 향한 아쉬움만을 토로하는 것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드웨어를 청산하고 소프트웨어를 최신형으로 바꾼다고 교회가 바뀌지 않는다. 그 안의 성도는 더더욱 변하지 않는다. 또한 변화를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 있는 결과와 함께 정착하게 될지도 미지수다.
어쩌면 교회의 캐릭터가 어떠한지 더 심층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하드웨어를 따라 하고, 유행하는 목회 시스템을 배운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각 교회의 고유한 캐릭터에 맞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장착하시길, 이를 위해 진실한 대화를 통해 우리를 알아가고,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소홀하지 않기를 바란다.
동일한 모양새로 찍어낸 교회가 많아지기보다. 각자의 지역에서 각각의 모습으로 반짝이는 교회가 많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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